평범한 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힘

평범한 것을 오래 들여다보는 힘
| 로버트 루트번스타인의 ‘생각의 탄생’을 읽고
우리는 흔히 예술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정반대라고 배운다. 하나는 감성이고 하나는 논리이며, 하나는 좌뇌의 영역이고 하나는 우뇌의 것이라는 식이다. 정작 자신은 논리가 아니라 이미지와 감각으로 먼저 생각했다는 아인슈타인의 고백이나, 과학자처럼 냉정하게 세상을 관찰한 화가들의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면 사실 그 배움이 얼마나 잘못된 주장인지 쉽게 생각해볼 수 있지만, 학교는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그 ‘예술의 방법’과 ‘과학의 방법’을 굳이 나누어 가르쳤던것 같다. 나누어 가르치는 편의성 때문이었을까.
나는 카메라가 세상을 보게 만드는 일을 한다. 여러 대의 카메라로 경기장을 훑고, 공과 선수를 쫓고, 센서가 읽어낸 신호를 이어 붙여 하나의 장면으로 만드는 일. 말하자면 나의 직업은 ‘관찰을 기계에게 가르치는 일’에 가깝다. 그래서 이 책의 첫 번째 도구가 ‘관찰’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 관찰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일이 결코 아니라고 못박는 대목이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무언가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그것만이 가진 특징을 발견하는 태도. 그리고 발견한 내용들을 엮어가는 생각의 여정. 아마도 이 책은 바로 그 과정을 통해 이 시대 사람에게 끝까지 남는 ‘몫’이 무엇인지 실마리를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관찰
관찰은 그냥 눈에 들어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무엇을 볼지 선택하고 오래 머무르고,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것에 눈길을 붙잡아두는 능동적인 행위로 정의한다.
조지아 오키프(화가)는 남들이 바빠서 그냥 지나치는 꽃 한 송이를 화폭 가득 크게 그리며 “무언가를 진짜로 본다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이야기한다. 관찰은 눈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정성의 문제라는 것이다. 바버라 매클린톡(유전학자)은 남들이 흘려버린 세포의 작은 움직임, ‘그 유기체에 대한 느낌’을 본다고하며 “옥수수 염색체 하나하나를 마치 친구 대하듯 오래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그것들이 자기에게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같은 것을 보아도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세상을 바꾸는 발견을 한다. 그 차이는 시력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태도’에 있다.
무엇보다 책에서는 관찰이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훈련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방법은 의외로 소박하다. 매일 지나치던 길을 오늘은 십 분만 더 천천히 걸어보는 것, 늘 곁에 있던 사물 하나를 골라 그 색과 결과 무게를 새삼 헤아려보는 것, 익숙한 얼굴에서 처음 보는 표정 하나를 찾아보는 것. 특별한 재능도 값비싼 도구도 필요 없이, 필요한 것은 그저 ‘멈추어 오래 보겠다’는 결심 하나 뿐이다. 관찰은 소수의 천재만이 지닌 특권이 아니라 마음먹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문이라는 것이 이 책이 건네는 가장 다정한 약속이 아니었나 싶다.
‘안도현의 발견’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책에서 안도현 시인은 우리가 매일 무심히 쓰고 버리는 지극히 사소하고 세속적인 사물들과 흔한 말들을 오래 들여다 보다가, 문득 그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길어 올린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평범한 것이, 시인의 시선이 머무는 순간 갑자기 낯설고 귀한 것이 된다. 그 책을 읽으며 ‘발견’이라는 것이 어디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밑의 평범한 것을 남들보다 조금 더 오래 바라보는 데서 온다는 사실을 배운다. 시인은 없던 세계를 지어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있는데 아무도 보지 않던 세계를 보아주는 사람이었다.
인공지능이 영상을 처리하는 방식을 설계하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사람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놀라운 일인가’를 매일 깨닫는다. 기계에게 공 하나를 쫓게 하려면, 그 공이 잔디와 어떻게 다른지, 조명이 바뀌면 색이 어떻게 변하는지, 선수의 다리에 잠깐 가려졌다 다시 나타나는 그 짧은 순간을 어떻게 이어 붙일지를 하나하나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아무 노력 없이 ‘그냥 보는’ 그 한장면 속에, 사실은 수천 번의 판단과 선택이 접혀 있다. 기계에게 관찰을 가르치는 일은 곧 인간의 관찰이 얼마나 정교하고 능동적인 행위인지를 거꾸로 배우는 일인 셈이다. 사람의 눈은 카메라처럼 세상을 그대로 담는 장치가 아니라, 매 순간 무엇이 중요한지를 판단하고 골라내는 해석의 기관이다. 그래서 나는 ‘관찰’을 책의 맨 앞에 둔 이 책의 배치가 참으로 바람직하게 느껴진다. 모든 창조는 결국 잘 보는데서 출발한다.
감각을 깨우는 노동
‘생각의 탄생’에 공감이 많이 된 건, 창조가 ‘영감’이 아니라 ‘노동’이라는 사실을 에두르지 않고 말하기 때문이었던것 같다. 창조력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재능이 아니며 치열하지 않으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못을 박는다. 흔히 천재의 머릿속에서 아이디어가 번쩍하고 완성된 형태로 튀어나온다고 상상을 하지만 그 ‘번쩍임’조차 오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사람에게만 무의식이 마침내 건네주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갑자기 답이 떠올랐다면, 꿈을 꾸다가 답이 생각났다면 그것은 이미 그전에 충분히 오래 매달렸기 때문이라는거다.
글을 쓰는 일도, 곡을 쓰는 일도 나에게는 한땀 한땀 머릿속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어떨 때는 몇 시간이고 책상 앞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야 한다. 한 문장을 얻기 위해, 한 마디의 멜로디를 위해, 뚜렷한 성과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이야기지만, 이런 ‘집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 확보되지 않으면 아예 시작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십 분, 이십 분씩 잘게 쪼개진 시간으로는 닿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 무언가가 떠오르려면, 감각이 충분히 데워지고 마음이 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갈 만큼의 연속된 시간이 필요하다. 창작은 스위치를 켜듯 시작되는 게 아니라, 오래 앉아 버티는 사람에게만 어느 순간 조용히 문을 열어주는 셈이다. 나는 그 ‘데워지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제법 즐기는 편이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그 무성과의 시간을 견뎌야 비로소 다음의 시간이 온다.
이 책의 ‘내면의 감각을 깨우는 방법’은 제법 구체적이다. 감각적 이미지를 인식하고,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보고, 배우기만 하지말고 직접 행동해볼 것을 추천한다.
먼저, 머릿속에 소리를, 질감을, 움직임을, 색을 실제로 불러일으켜 언어 이전의 ‘감각’을 생각해보는 것, ‘시각적이고 근육적인’ 이미지를 상상해 보는 것을 해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빛을 타고 달리면 무엇이 보일까를 몸으로 상상했고 그 감각적 이미지를 나중에야 수식으로 옮겼다고 하고, 파인먼은 방정식을 볼 때 글자마다 색이 입혀져 보인다고 한다. 이들에게 생각은 추상적인 기호의 조작이 아니라 생생하게 보고 느끼는 감각의 사건인 셈이다. 글을 쓸 때 먼저 잡히는 것은 활자가 아닌 어떤 분위기와 온도이고, 곡을 쓸 때는 악보와 음표가 아니라 소리의 ‘덩어리’를 생각하는 감각을 익힐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해보라고 권한다. 놀이처럼, 목적 없이, 그저 손이가는 대로 이것저것 만들어보는 그 자유로운 시간 속에서 진짜 발견이 나온다고 한다. 쓸모를 따지지 않고 마음껏 가지고 놀 때 머리는 가장 자유롭게 움직이고 뜻밖의 연결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실 나이들고 직장생활을 하고, 또 가정을 꾸리고 나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 지점이다. 돈이 되는 일, 결과가 명확한 일에 대해서만 집중을 하게 길들여져 있지 않은가. 쉬울리가 없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그 시간의 투자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배우러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연장선상에서, 이 책은 마치 그런 우리를 알고 있다는 듯 배우기만 하지 말고 직접 행동해볼 것을 권한다. 지식으로 아는 것과 몸으로 겪어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앎이라는 것. 저자들이 ‘몸으로 생각하기’라는 별도의 도구를 둔 것도 그런 이유일것이다. 무용가는 몸으로 생각하고, 조각가는 손으로 생각하며, 뛰어난 과학자조차 실험 도구를 직접 만지며 몸의 감각으로 답에 다가간다. 책을 백 권 읽어 아는 것보다 한 번 직접 만들어보며 부딪힌 실패가 더 깊은 앎을 남기는 이유를 모르지 않는다. 좋은 문장에 대해 백 마디 조언을 듣는 것 보다, 형편없는 초고를 스무 번 고쳐 쓰며 스스로 무너뜨려본 경험이 훨씬 깊은 감각을 남길 것이다. 늘 그런 통과의 더딘 과정이 서툴고, 여러번 실패를 동반하기에 우리는 그저, 그동안 어떻게 견딜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 하면 된다.
사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지 않나? 대단한 비법이 아니다. 책에서, 익숙한 방식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여 눈 앞에 펼쳐놓은 덕에 잠깐의 반가움, 그리고 반가움보다 낯선 질문. 나는 그것들을 정말 ‘방법’으로 의식하며 해왔던가 아니면 그저 손이 가는 대로 해온 일들을 지금 와서 그럴듯하게 되짚고 있는 것인가? 언젠가부터 쓸모없는 일은 잘 하지 않게 된 어른들이, 목적 없이 무언가에 빠져드는 시간은 너무나도 무가치해 보이는 어른들의 하루에서, 그 쓸모없음이야말로 최고의 ‘창조의 조건’이라는 점을 나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나? 나 스스로에 대한 흐뭇한 확인 혹은 서늘한 점검. 적어도, 무뎌지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줄 질문임은 확실하다.
세상이 빨라지는 것에 따라 도구도 갈수록 똑똑해진다. 오래 앉아있는 시간, 아무 성과 없이 한 사물을 골똘히 바라보는 시간, 감각이 충분히 데워지기를 기다리는 그 시간의 가치를 붙들고 싶어질 때, 이 낭만적인 게으름을, 머무름을, 무가치해보이는 머뭇거림의 시간을 함께해 줄 AI라는 도구, 새로운 조력자들이 생겨났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우리들의 질문에, 그 오랜 어려움에 어떻게 함께해 줄 수 있을까?
풍부해질수록 전하기 어려워진다
머릿속의 이미지가 풍부해지면 풍부해질수록 그것을 말과 글로 옮기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내 마음속에 떠오른 이미지를,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그 덩어리를 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내어야 타인에게 전달이 가능해진다. 이 책은 창조적 사고가 언어 이전의 자리에서 먼저 일어난다고 말한다. 처음 떠오르는 것은 말도 그림도 수식도 아니고, 느낌에 가깝고 이미지에 가깝고 몸의 감각에 가깝다. 책에서는 이것을 ‘전논리적 사고’, 즉 논리 이전의 사고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그 언어 이전의 이미지는 언제 비로소 ‘완성’되는 걸까? 최애 철학자인 비트겐슈타인의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말을, 언어로 옮겨내지 못한 나의 생각이나 의도와 맥락은 아무리 생생하게 떠올랐어도 아직 온전히 내 것이 아니다로 읽는다. 머릿속의 이미지는 선명해 보이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기 전까지는 반쯤만 태어난 상태, 나조차 그 정체를 다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는다. 끝내 말이 되지 못하고 침묵으로 남는 잔여. 창작자든 개발자든 그들의 근본적 외로움은 아마도 여기서 오는 것 같다. 가장 뜨겁게 떠올린 것일수록 가장 온전히 언어가 되기 어렵다. 뭐랄까, ‘언어화의 관문’이랄까.
앞서 새로운 도구, 새로운 조력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OpenAI의 창립 멤버이자 딥러닝 연구자인 안드레이 카파시는, 요즘 AI에게 무언가를 시킬 때 정교한 프롬프트를 쓰려고 애쓰는 노력 대신 음성 모드로 전환해 십 분이든 그 이상이든 그냥 편하게 기대앉아 두서없이 주절주절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고 했다. 완벽하게 다듬은 짧은 지시문보다, 맥락을 충분히 넘치도록 풀어놓는 편이 AI가 내 의도를 훨씬 잘 이해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이야기다.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정리하고 구조를 잡는 뒷일 또한 AI에게 맡긴다고 했다.
‘언어화의 관문’ 위에 겹쳐 생각해보면 마음속 이미지를 말과 글로 낳는 일을 새로운 조력자에게 맡기고 있는 상황이다.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느낌의 덩어리들을 완벽한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 스스로 벼려가며 홀로 애쓰는 대신 일단 있는 그대로 쏟아내고, 그 좁고 손실 많은 통로에 언어화를 거드는 새로운 손 하나를 들여놓은 셈이다.
나도 요즘 비슷한 방식으로 일한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의 뭉치가 어렴풋이 잡히면, 그 어렴풋한 상태 그대로 두서없이, 떠오르는 대로 풀어놓는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조각들, 반쯤만 맞는 비유들, 서로 어긋나는 생각들까지 그냥 쏟아낸다. 그러면 그 흩어진 조각들이 어떤 얼개로 묶일 수 있는지, 어떤 순서로 놓으면 남에게 가닿을지를 함께 궁리할 상대가 생긴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소리 내어 풀어놓는 과정 자체가 오히려 내 생각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막연했던 것이 말이 되어 나오는 동안, 나 자신조차 모르던 내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마치 친한 친구에게 고민상담을 위해 주절주절 생각을 털어놓다가 스스로 해답을 찾는 과정을 만나는 것 처럼.
이러한 변화가 흥미로운 이유는, 예를 들어 ‘AI가 인간의 창조성을 대신하게 될 것’같이 흔히 하는 걱정과 정확히 반대 방향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 방식에서 AI가 덜어주는 것은 정리의 영역이다. 인간에게 오히려 더 절실히 남는 것은 원초적인 자리에서 무언가를 길어 올리는 힘이다. 잘 보고, 잘 느끼고, 잘 상상하는 힘. 관찰하고 발견하는 힘. 언어화를 돕는 도구가 아무리 좋아져도, 언어로 옮길 ‘원재료’를 마음속에서 끌어내는 일만큼은 여전히, 온전히 사람의 몫으로 남는다. AI에게 주절주절 풀어놓을 그 ‘주절거림’의 밀도와 깊이는, 결국 그 사람이 얼마나 오래 세상을 들여다보았는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것은, 오래 들여다보는 힘
언어화를 손쉽게 기계에 맡기다 보면, 스스로 문장을 깎으며 생각을 다듬어온 그 오래된 훈련이 무뎌질 위험도 분명히 있다. 언어화의 과정 자체가 또 하나의 사유였고, 머릿속 덩어리를 문장으로 옮기려 애쓰는 그 씨름 속에서 생각이 비로소 선명해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AI를 언어화의 조력자로 들이는 일은, 사유의 수고를 통째로 떠넘기는 일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디까지를 맡기고 어디부터는 끝까지 내손으로 붙들 것인가. 그 경계를 스스로 정하는 감각 또한, 결국 오래 써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안목이다.
AI를 언어화의 ‘조력자’로 받아들이는 이 방식이, 관찰과 감각의 훈련을 낡은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귀한 것으로 만든다는 생각이다. 도구가 손을 덜어줄수록 그 손이 무엇을 길어 올릴지를 정하는 눈과 마음의 몫은 도리어 커진다. 인공지능 앞에서 진짜 힘을 발휘하는 것은 매끄러운 지시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지닌 맥락의 두께다. 같은 도구를 손에 쥐여줘도, 한 분야를 오래 파고든 사람의 주절거림에는 설익은 사람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밀도가 담긴다.
세상은 갈수록 빨라지고, 도구는 갈수록 똑똑해진다. 그럴수록 나는 오히려 오래 앉아 있는 시간, 아무 성과 없이 한 사물을 골똘히 바라보는 시간. 그 느린 시간의 가치를 더 붙들고 싶어진다. 무언가를 마음 속에서 길어 올리는 일은 여전히 느리고, 치열하고, 온전히 사람의 것이지만 빨라진 세상에서 느림은 무능이 아니라 마지막까지 남을 인간 고유의 능력임을 믿는다.
‘생각의 탄생’은 위대한 창조자들의 이야기지만, 정작 내게 오래 남은 것은 그들의 천재성이 아니라 그 천재성을 떠받친 습관의 평범함이었다. 잘 보려고 애쓰는 일, 배우는데서 멈추지 않고 직접 해보는 일, 몇 시간이고 앉아 머리를 쥐어짜는 일. 그 습관들이 창조의 가장 오래된 뿌리라면, 정작 어려운 일은 그것을 알아보는 데 있지 않고 매일 지켜내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뿌리는 아무리 좋은 도구가 나와도 대신 자라주지 않는다. 나는 앞으로도 평범한 것들을 오래 들여다볼 생각이다. 발견은 언제나 그 오래 머무는 시선의 끝에서, 조용히, 그러나 틀림없이 시작될 것이므로.